그와의 추억

Sungik

"너희들은 나보다 훨씬 더 잘하게 될꺼야"

2010년 10월 13일

포항공과대학교 물리학과 88학번 양철수


"내가 너 만할 땐, 너보다 더 못했어"

이성익 교수님을 떠올리니 이 말이 먼저 생각난다. 교수님은 참 격려를 많이 하여주시려 하였다는 생각이다. 포항공대에 갓 입학한 나에게 포항공대의 교수님들은 참으로 어마어마하게 여겨졌다. 마치 위인전기에서 보았던 과학자의 이야기처럼 어린 나이부터도 지적 능력이 보통사람들과 확연히 다르게 특출났고, 저명 대학에서 유학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단한 분들로 생각되었다. 또한 포항공대의 초기의 젊은 교수님들은 학생들 교육에도 매우 의욕이 넘쳤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본인들도 그때 우리들과 같은 환경이라면 본인들이 더욱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시고, 후배들이 더 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컷 던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교수님들이 "... 내가 너희 때는 말이야...", "... 내가 공부할 때는 말이야..." 하면서 교수님들께서 공부할 당시에 얼마나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셨는가 하는 경험을 무용담 식으로 이야기하며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을 들을 때마다, 교수님들과 나랑은 자질이 이미 다른 것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에 따라, 자신감도 줄어들고, 의욕도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성익 교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 만할 때는 너희들보다 더 못했어..."등으로 자신감을 많이 북돋우어 주셨다. 교수님께서는 항상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본인보다 훨씬 낫다고 칭찬하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교수님 본인보다 훨씬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셨다. 그런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능력 부족을 차책하며 줄어들던 자신감도 다시 회복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성익 교수님은 강의에서도 학생들을 많이 격려하셨다. 학생들의 질문을 자꾸 유도하시고 질문을 칭찬하셨다. 우리 물리과 88학번들은 이상하게 이성익 교수님과 인연이 있어서 강의를 다른 교수님에 비애 많이 들었다고 생각된다. 일반물리실험, 현대물리, 역학II, 양자역학I, 고체물리, 고체물리실험, 등. 현대물리시간에 많은 흥미진진한 물리적 발견과 업적 등을 배울 때도 "... 아... 좋은 질문이 계속해서 들어오는데..."하시면서 학생들의 질문을 칭찬하고 질문에 흥미진진하게 답하셨던 기억이 많다. 또한 하나의 질문에 관련하여 말씀하신 후에도 "... 자 이제 이러니까, 또 다른 질문이 생각나지 않아?" 하시면 질문에 질문이 꼬리물도록, 학생들이 생각을 자극하고 호기심을 가지도록 흥미롭게 강의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성익 교수님의 흥미진진하고, 본인 스스로 물리 공부가 즐거운 마음이 전해지는 강의를 들으면, 물리과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과 재미나게 물리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조금 빠지기도 한 것 같다.


학부생들에게 물리에 대한 흥미를 돋우워주시려 학부생을 위한 세미나를 가끔 해 주셨는데, 쉽고 매우 흥미진진하게 해 주셔서 세미나에 대한 인상이 매우 깊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한창 C60의 발견과 특성, 그리고 응용에 대한 연구가 관심을 끌기 시작할 때, C60, 플러린에 대해 세미나를 해 주셨는데, C60의 구조를 소개하면서, 그 구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고 하시며 짠 보여주신 슬라이드가 월드컵 광고에 나오는 운동장 한가운데 축구공이 놓여있는 것이였다. 이성익 교수님의 세미나는 유머와 위트, 그리고 열정이 묻어나는 재미있는 세미나였다. 세미나를 듣고 나면 나 스스로 물리에 대한 흥미와 도전하고픈 마음이 다시금 조금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성익 교수는 학생들에게 매우 친근한 교수였다. 마치 친구 사이처럼 우리들과 농담도 하고 장난도치고 하며 우리 학생들과 어울렸다. 우리들과 운동이나 어떤 활동 등도 많이 하셨는데, 적당히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운동은 특히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특히 농구는 이성익 교수님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가 없다. 교수님은 작은 키에도 농구를 아주 좋아하시고 잘하셨다. 처음에 교수님이라 배려하는 식으로 함께 농구를 하려 했다간 큰 코를 다치는 경우가 많다. "패스!, 패스!, 여기! 여기!" 하고 외치시고 기합 넣으며 농구하는 교수님과 한번 뛰어보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교수님과 몸싸움도 하고 마크도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교수님의 밥이 된다. 교수님의 거친 수비를 당해보면 저절로 승부욕이나 악이 돋아 정말 열심히 뛰게 될 것이다. 당시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는 교수님은 아마 체육특기자로 포항공대 교수로 들어오신 것 같다는 농담이 있었다. 그 농담을 교수님께도 스스럼없이 하곤 했다. 그렇게 교수님과 땀 흘리며 부대끼고 장난치다 보면 정말 교수님이 동료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우리들과 농담도하고, 장난도 치고, 운동도 하고 친구처럼 가까운 교수님이시면서, 학생들에게 물리에 대한 열정과 흥미를 불어넣어 주시려 많이 애쓰셨다고 기억한다. 교수님 스스로가 물리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팍팍 느껴질 정도였다. 본인이 가진 물리에 대한 열정을 학생들도 함께 가지고 본인보다 더 물리를 좋아하고 잘하기를 바라셨다. 학생들이 입학 당시에 가졌던 물리에 대한 열정이 식는 것을 안타까와 하셨고, 꾸준히 계속 물리를 공부하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셨다. 특히, 고온초전도에 관련된 물리는 매우 흥미롭고, 고온초전도 현상에는 많은 풍부한 물리가 숨어 있어서 물리학도로서 평생을 두고 도전해 볼만한 분야라고 강조를 많이 하셨다. 교수님의 고온초전도 연구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말씀이셨다.


교수님은 물리 공부에 겸손하셨다. 학생들에게 흥미와 의욕을 심어주시고, 많은 걸 알려주시면서도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학생들에게도 배운다고 말씀을 많이 하셨다. 교수님 연구 그룹의 학생들과 몇몇 학생들이 교수님과 함께 주요 논문과 책을 가지고 돌아가면서 세미나를 하고, 어떤 주제를 함께 공부한 적이 많았는데, 세미나에서 활발히 서로 질문을 하고 논의하며 공부한 기억이 소중하게 남아있다. 그 때마다, 교수님께서 세미나를 준비하고, 발표하고, 함께 논의한 학생들에게 고맙다고 많이 배웠다고 말씀하셨다. 교수님 덕분에 학생들이 많이 배웠는데 참으로 겸손한 말씀이셨다. 교수님의 배움의 자세는 참 좋은 교훈으로 남아 있다.


교수님은 우리들에게 친구 같이 가까웠지만, 역시 스승이셨다. 교수님께서 친근하게 학생들과 어울리려 하시는 마음을 알기에, 나를 포함해서 우리들은 고민하고 방황할 때, 어려울 때 교수님께 이야기하고 상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수님은 어린 우리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우리들의 입장에서 들어주고, 인내를 가지고 지원해 주시려 하였던 것이 많다. 학생들이 물리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와 지원을 해주셨다. 교수님께서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어린 대학생이였던 날 많이 배려해주시고 격려해 주셨지만, 결국 난 석사를 마치고 교수님의 바램을 뒤로하고 학교를 떠나 취직을 하기로 하였다. 교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여러가지 은혜와 관심 때문에, 말씀을 드리기 무척 죄송스러웠지만, 나의 결심을 어렵게 교수님께 말씀 드렸다. 교수님께서는 무척 서운해 하셨으나, 그럼 한번 겪어보고 다시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교수님은 어린 학생의 생각이라도 존중하고 배려해 주시려 하셨다.


몇 년 간의 사회생활 후에 여전히 방황하는 나는 다시 물리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고, 교수님께 추천서를 부탁 드리러 찾아 갔었다. 예전에 교수님의 설득을 뿌리치고 결국 학교를 떠났었기에 추천서 부탁이 죄송스러웠는데,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안 써주면 누가 써주겠냐?"고 하였다. 죄송스러움에 몇 통이나 써주실 수 있는지 여쭈었는데 몇 통이나 필요하냐고 얼마든지 써주시겠다고 하셨다. 교수님은 참으로 언제나 학생 편에서 방황하는 학생, 인생을 이해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덧붙이시는 말 한마디, "혹시, 미국에서 입학허가서 못 받아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어려워 말고 말해라." 여전히 교수님은 학생에 대한 배려를 거두지 않으신 분이셨다.


난 미국에서 결국 학위는 하였다. 교수님께서 강조하시고 열정을 품으셨던 초전도 분야는 아니지만,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도전해 볼만한 분야 중의 하나인 자성 관련 분야를 전공하였다. 자성 관련 분야를 선택한 것도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동기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고온초전도 분야는 좀 어려운 듯하고, 그래도 자성 분야가 초전도보다 조금 쉬워 보였다. 학위는 하였으나 여전히 산만한 인생을 살고 있는 나는 교수님께서 바라시는 방향으로 일은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느낌이다.


언론에서 처음 접한 교수님의 죽음은 내게는 참으로 충격이였다. 더구나 자살이란 방법을 택하신 것은 내가 갖고 있는 교수님의 인상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였다. 교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자살하더라도 제일 자살 같은 건 안 하실 분으로 인상되어 있다. 항상 긍정적이고 쾌활하시고, 거기다 에너지 넘치시고, 물리에 대한 열정 등을 생각할 때, 결코 쉽게 꺽일 분이 아니라 생각되었다. 학생들과 자장면 내기도 하고, 학생들과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놓고 다투시고, 오호호호호…, 낄낄거리며 웃으시는 교수님의 웃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교수님의 자살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런 교수님의 죽음은 안타깝고 죄송스런 마음이 들게 했다. 교수님과 함께한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워하고는 있지만, 필요할 때 교수님을 찾은 이후로, 귀국해서는 교수님께 인사도 드리지 못하였다. 인사드리고 싶었지만 현재의 여전히 산만한 생활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여겨져 나중에 나중에 하며 미루었었다. 가끔 언론 등에서 교수님께서 하시는 연구와 성과 등이 소개될 때마다, ‘캬!… 역시…’하며 속으로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며 ‘여전히 잘하시고 계시는구나’하고 생각하였었다. 교수님을 떠올리니 먼저 낄낄거리는 듯하며 ‘오호호호호홍’하고 웃으시는 장난기 있는 웃음과 목소리가 떠오르는데, 그런 교수님을 이제는 뵐 수가 없다니 여전히 뭔가 이상하고 무언가 잘못된 느낌이다. 교수님께서 이젠 안 계신다고 생각되니, 이제서야 여전히 산만한 나의 생활을 보고 무어라고 하실까? 지금이라도 이제라도 조금이라도 교수님 마음에 들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되나? 하는 때늦은 생각을 하게 된다.

9 to 2

학생시절, 교수님의 구호는 "Nine to two (근무시간이 오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였지요. 그래도 누구보다 활기차게 실험실에 가장 먼저 나오시곤 했는데.피곤해서 축 처진 학생들에게 농구하러 가자고 조르시곤 했는데..

Match Maker?

포항공대 초전도 연구실은 유난히 연구실 내 커플이 많이 탄생하였다.

김완선-권기정, 박정우-최만수, 박현정-최재혁, 도현진-김지연, 최은미-김형진 등 많은 커플들이 연구실 내에서 탄생하였다.

혹자들은 학생들이 초전도 현상의 원이이라 볼 수 있는 Cooper pairing 보다는 자신들의 pairing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하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함께 열심히 공부하면서 정이 싹튼 것이 아닐까?


카세트 테잎

90년대 초, 아직 음악을 테이프로 듣던 아날로그 시대일 때였다. 자정 넘어서까지 연구에 몰두하셨던 교수님의 책상 위에는 항상 카세트 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그 방을 들어서면 나직막히 틀어놓으신 가요나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었는데, 해바라기의 통기타 음악도 있었고 샤콘느라는 바이올린곡이 생각이 난다.

특히 비탈리의 샤콘느를 좋아 하셨던 교수님은 카세트 테잎 양쪽 면에 온통 샤콘느 한곡만을 녹음하여 현대 엑셀 승용차를 운전할 때마다 반복해서 듣곤 하셨다.

나의 영원한 싸부

이성익교수님은 지금의 나를 키워주신 영원한 나의 싸부이다.

나의 영원한 싸부 이성익 교수님 ... 사랑합니다.

교수님이 누구에게나 보여주셨던 친절과 평화와 사랑이 하늘에서도 빛날 것입니다.


나의 싸부는 참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물리학을.

항상 물리학이 나의 인생이라며 언제까지나 물리공부를 할 수 있는 인생이라 감사하다고 했다.

특히, 초전도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정말 행복하다고.

학부3학년 겨울방학이던 1989년 겨울에 교수님의 실험실에 연구참여생으로 들어가 1997년 2월에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참 공부도 많이 하고 실험도 하고 세미나도 하고 학회도 가고 ... 인생상담도 하고 내 20대 청춘의 시간을 거의 모두 교수님과 함께 연구실, 실험실에서 보냈다.

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공부 좀 한다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친구들로부터 치켜세움을 받다가 대학교에서 만난 쟁쟁한 친구들의 모습에 주눅도 들고 공부도 안되고 괜히 물리학과에 왔나 하는 고민이 있던 때였다. 기껏해야 양자역학 정도 배운 학부생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해 주셨던지 물리를 더 공부해도 되겠다는 자신감과 물리를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를 실질적으로 알게 해 주셨던 것 같다.

그때 박사과정으로 있던 한규현 선배와 함께 초전도체를 만들어 전기저항을 재는 순간의 기쁨을 잊지 못한다. 마치 내가 세계 최초로 그런 물질을 만들어 낸 것처럼 환호가 저절로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간단하게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책으로 배웠던 화학계산을 거쳐 복잡한 화학물질의 필요한 용량을 알아내고 손을 움직이기 힘든 후드 안에서 0.001g 까지 재는 전자저울로 정확하게 측정하여 막자사발에 섞는다. solid state reaction 과정을 위해 오른손으로 1,000번 왼손으로 1,000번을 갈아야 했다. 중심을 약간이라도 벗어나면 엄청난 힘으로 튕겨나오는 pressure machine에서 pellet으로 만들어 낼 때의 긴장감은 지금도 떨림을 준다. furnace에서 필요한 온도를 설정하여 기다리기를 일주일. 마침내 나온 시료가 초록색이면 실패, 검정색이면 성공가능성. 그동안 교수님의 실험실에서 축적해놓은 기술을 따라 한 덕분에 우리의 시료는 초전도임을 당당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강의시간에 들었던 많은 과목, 그 과목들에서 정신없이 삐져나오는 공식들이 물리연구에 어떻게 같이 힘을 합해 작용하는지를 알게 된 첫경험이었다. 그때가 내가 초전도체를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시간이었다.

그 후로 박사학위를 할 때까지 교수님과 단짝처럼 참 재미있게 일하고 공부했다. 학교를 떠나서도 새로운 결정의 순간마다 친구처럼 아빠처럼 항상 지지해주시고 힘을 주셨다. 아마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과 경험의 순간에 교수님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우릴 두고 황급히 가셨어도 남은 우리는 교수님과의 좋은 추억이 많고 행복한 기억이 많아 괜찮다고 했다. 교수님도 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고 가셔서 어쩌면 다행이라고 했다. 우리가 기억하기에는 교수님이 행복했던 시간이 훨씬 많았으므로 편히 가시게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눈물은 나지만 편히 쉬시라고 하기로 했다.

20년이 넘게 교수님께 배우고 교수님이랑 연구하고 실험하고 논문쓰고 공부하고 토론하고 의논하고 상담하고 기대고 놀러가고 밥먹고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차타고 운동하고 ... 같이 한 것이 너무도 많다.

내가 연애하는 것부터 결혼하는 것도 봐 주셨고, 아기 낳아 데리고 가면 봐주신 것, 애들 크는 순간마다 기억해주신 것, 내가 하는 일마다 도움 주신 것, 격려해 주시고 지지해주신 것 ... 지켜봐주신 것이 너무도 많다.

내게 그런 분이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 지금에서야 절절하다.

항상 문자나 이메일에 "미요기에게 싸부가" 라며 애정을 주셨는데...이제 그런 문자는 안오겠다.

그 기억이 참 소중하고 그래서 감사하고 고맙고 애틋하고 그래서 눈물이 나지만 괜찮다 하기로 했다.

미처 되돌려 드리지 못한 것을 해드리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우리가 함께 했던 행복의 순간들

그는 늘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행복해했다. 사진첩 보기

반짝이는 것들을 사랑한 별

그는 참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했다.

반짝이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출장만 가면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손에 들고 나타났고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좋아했고

노래도 'Starry starry night'로 시작하는 Don McLean 이 부른 'Vincent'를 좋아했다.


  • "Vincent" is a song by Don McLean, written as a tribute to Vincent van Gogh: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ey,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Shadows on the hills,
Sketch the trees and the daffodils,
Catch the breeze and the winter chills,
In colors on the snowy linen land.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ry, starry night.
Flaming flowers that brightly blaze,
Swirling clouds in violet haze,
Reflect in Vincent's eyes of china blue.
Colors changing hue, morning field of amber grain,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
Are soothed beneath the artist's loving hand.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For they could not love you,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And when no hope was left in sight
On that starry, starry night,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But I could have told you, Vincent,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Starry, starry night.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
Frameless head on nameless walls,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
Like the strangers that you've met,
The ragged men in the ragged clothes,
The silver thorn of bloody rose,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